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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17

BOOK 만화, 느와르의 조건을 말하다 (2)

느와르는 장르가 아니라 정서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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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강조하자면 여기서 느와르로 엮은 작품들의 공통분모는 ‘숙명론적 비극’이다. 물론 작품마다 그것을 소화하는 방식, 차지하는 지분은 조금씩 다르다. 그저 스타일리시한 액세서리로 쓰이기도 하고, 지독하게 무겁고 암울한 정서를 사정없이 뿜어내거나, 묘한 향수를 자아내는가 하면, 또는 비극 자체가 인간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되기도 한다.



도구화된 불사의 몸은 얼마나 허무한지

<DOGS>, 미와 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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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드 사이언티스트가 창조해낸 불사의 인간병기, 파란만장한 과거를 숨긴 채 세상 불행 다 짊어졌다고 이마에 써 붙이고 사는 주인공, 그와 유일하게 신뢰관계로 맺어진 낙천적인 파트너, 숙명의 적, 그리고 딱 봐도 각자 사연 많은 주변인물까지. 


<DOGS>의 기본 설정과 이야기의 뼈대는 ‘어디서 한 번쯤 봤음직한’ 정도가 아니다. 숫제 하나의 장르라 할 만큼 온갖 익숙한 요소의 집결체다. 그리고 이런 세기말적 느와르가 대개 그렇듯, 징글징글한 과거는 주인공을 놓아주지 않고 물귀신 작전을 펼친다. 이런 진부한 이야기를 지루하게 만들지 않는 건 매력적인 작화와 연출이다. 마치 영화의 스틸 프레임을 보는 듯한 구도, 배경을 심플하게 처리하고 캐릭터에게 집중된 그림은 흔치 않은 ‘간지’를 선사한다. 


주목할 만한 것은 전투 신이다. 이 만화의 주요 캐릭터들은 일본도를 휘두르는 검사, 그리고 권총을 쓰는 건맨의 두 부류로 크게 나누어지는데, 주인공 하이네는 사슬로 연결한 쌍권총을 애용한다. 근력, 순발력, 회복력까지 불사에 가까운 오버 스펙이지만, 그의 진정한 특기는 몸을 돌보지 않는 근접전이다. 특히 자신과 같은 조건인 조반니와 싸울 때면 둘 다 걸레짝이 된다. 무한의 육체는 그저 도구가 되고, ‘목숨을 건다’는 인간적인 조건조차 내걸 수 없는 싸움이 되는 것이다. <DOGS>는 이런 스타일리시한 허무를 숨기지 않는 작품이다. 



보통사람의 눈에 비친 특별한 비극

<블랙 라군>, 히로에 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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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라군>의 등장인물들은 참으로 쿨하다. 은혜든 복수든 결말은 확실히 짓고, 필요한 일 외에는 간섭하지 않는다. ‘나쁜 놈들이니까 나쁜 짓을 한다’는 식이다. 그것이 가상의 환락도시 로아나프라의 약육강식에서 살아가기 위한 룰이다. 그리고 마피아 운송업과 해적질을 하는 소규모 조직 ‘블랙 라군’에 어느 날 일본인 샐러리맨 록이 끼어들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블랙 라군>은 리얼리티를 가볍게 무시하는 만화다. 사지가 날아가는 폭력성과 다분히 황당무쌍한 액션이 엇박자를 이루며 공존한다. 지나치게 쿨한 캐릭터들은 가끔 범죄자가 아닌 중2병 십대들로 보이기도 한다. 여기서 록의 존재는 자칫 단조로워지거나 산으로 갈 수 있는 만화를 끌어주는 동력이다. 살아온 세계와 가치관에 조금의 접점도 없는 갱스터와 화이트 칼라 사이에 갈등이 없을 리 없기 때문이다. 특히 빈곤과 범죄의 한가운데에서 태어나다시피 한 여자 레비는 록과 끊임없이 충돌한다. 


로아나프라에서는 일상처럼 일어나는 일들, 부조리하다는 걸 알면서도 모두 숙명으로 받아들였던 죽음들은, 상식과 도덕에 매인 보통사람의 프레임을 거치면서 특별한 비극이 된다. 특히 2권에서 아비규환을 연출했던, 스너프 출연으로 인해 괴물로 자라난 남매 ‘헨젤과 그레텔’의 죽음은 몇 번이고 곱씹게 되는 비장한 씁쓸함을 남긴다.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꾸는 사람들에 대하여

<카우보이 비밥>, 와타나베 신이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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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우보이 비밥>은 ‘옛것’의 향수가 곳곳에 흐르는 애니메이션이다. 20세기 재즈가 BGM으로 깔리는 가운데 스페이스 활극을 펼치고, 홍콩 느와르에 대한 오마주도 수없이 드러난다. ‘스스로를 ‘시대에 뒤처진 카우보이”라고 칭하는 주인공은 이소룡의 절권도를 구사하고 제리코 941이라는 마니악한 총을 휘두른다. 


‘과거’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은 이 독특한 SF의 느와르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테마이자 키워드다. 스파이크를 비롯해 <카우보이 비밥>에서 스쳐가는 모든 이들은 좀처럼 부러놓을 수 없는 무거운 과거를 떠안고 있고, 그래서 향수와 회한에 빠진 채 돌아갈 곳을 찾아 부유한다. “한쪽 눈으로는 과거를, 다른 한쪽 눈으로는 미래를 보고 있다“는 스파이크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세상에서 내몰릴수록 사람은 과거를 돌아본다. 비현실적인 낙원을 그리지만 현실은 위태롭기 그지없고, 달콤한 꿈의 유통기한은 짧다. 그래서 대부분의 에피소드는 낭만적이면서도 외롭고 쓸쓸한, 혹은 좌절된 꿈에 대한 안타까움과 연민을 남긴다. 결국 이 작품은 SF와 느와르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누구의 현실세계에도 적용되는 이야기다. 


24화 ‘Hard Luck Woman’의 마지막 장면. 그 비밥호에서 유사가족을 이루었던 이들은 결국 현실을 찾아 각자의 갈 길을 떠난다. 남겨진 스파이크와 제트는 아무 말 없이 4인분의 식사를 꾸역꾸역 삼킨다. 그리고 커다란 가방을 머리에 이고 떠나던 에드는 잠시 뒤를 돌아본다. 그 유명한 스파이크의 ‘Bang’ 이상으로 짠한 여운을 남기는 장면이다. 



Editor_최승우

swchoi@dnolt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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